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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홍보대사 리치 프랭클린의 은퇴

 


리치 프랭클린은 항상 가장 챔피언 같지 않은 UFC 챔피언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 때문에, 이번 월요일 40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한, 리치 프랭클린이 UFC 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직 고등학교 교사로 수학 학사, 교육 석사 학위를 지닌 프랭클린은 2005년에 미국 전역에 방송된 켄 샴락과의 경기를 통해 MMA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05년 4월 라스베이거스에서 경기를 치를 때 신시내티 출신의 리치 프랭클린은 6년간 MMA에서 경력을 쌓았던(UFC 3전 포함) 상태였다. 그리고 2005년이 되어서야 전업 파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프랭클린은 그날 밤 켄 샴락을 1라운드에 제압했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삶을 송두리채 바꿔버린 것은 자신의 경기보다 앞서 열린 한 경기였다.
같은 날 대회에서 포레스트 그리핀과 스테판 보너가 TUF 시즌 1 라이트헤비급 결승전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명승부를 펼쳤다. 그리고 이는 미국 MMA가 폭발적 성장세의 시작이었다. 리치 프랭클린이 아니면 그 누가,  사람들의 오해를 사고 있는 MMA라는 스포츠를 홍보할 수 있겠는가? 비평가들이 MMA를 잔인하다고 평하며 MMA 선수를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부르던 시기에 UFC가 그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2005년에 MMA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저 정도였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프랭클린과 같은 선수들, 즉 과거 이력도 출중한데다 이치에 맞지 않는 질문을 처리하고 교육받은 사람이 자신의 열정에 대해 설명하듯 MMA를 설명하는데 시간을 쏟을 선수들이 있었다.
 “저에겐 사람과 부대끼는 직업이 어울립니다”라고 프랭클린은 말했다. “교육학 학위가 있고 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확실히 제가 말도 잘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도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 저는 인터뷰하는 요령도 타고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요령은 여러 장소에서 사용되었다. 프랭클린은 미국에서만 MMA를 퍼트리는 대사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여행했다. 북아일랜드, 캐나다, 아일랜드, 독일, 브라질, 중국에서 경기를 가졌다. 그리고 장소에 상관없이, 그리고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프랭클린이 이야기해주는 한 가지 사연. 프랭클린과 그의 형제가 대학생 시절 신시내티 시내의 5성급 식당에서 주차요원으로 일을 할 때였다. 유명한 프로선수가 식당의 근처의 한 코너에 서있었고 프랭클린 형제는 사인을 받기 위해 다가갔지만 무례한 대접을 받았을 뿐이었다.
“꽤나 나쁜 경험이었죠. 그 시점에 저는 유명인, 특히나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던 건 기억합니다. ‘내가 만약 유명해지면 팬들에게 절대로 무례하게 굴지 않을 거요’라고 했었죠. 그 사람은 ‘그럼 난 그런 무례한 인물은 아니군. 누군가가 나랑 만났을 때 나오는 성격은 실제로 내 성격이거든. 기분이 별로인 날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저 내가 누군가에게 사인을 해줄 기분이 들지 않는 날은 내가 집에 머무르기에 적당한 날이란 거지’라고 말하더군요”
“내가 사인을 받기위해 줄을 서있는 팬과 소통하는 걸 봤더라면, 사람들은 행사로 몰려와서 저에게 기대서 귀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죠. ‘리치, 이 사람들 다 사인해줘야겠는데’라고요. 저도 줄을 서있는 모든 사람이 저와 함께 하는 시간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이날 사인회에 혼자 참석한 팬이라고 느끼길 원합니다. 저는 항상 그런 방식으로 행동했어요. 제대로 해내지 못할 거라면 아예 하지를 말아야죠”

프랭클린은 UFC가 슈퍼파이트를 치를 때만 연락을 했던 선수는아니었다.  2005년 6월 UFC 53 대회 에반 터너와의 2차전 승부에서 거둔 4라운드 TKO승에 힘입어 UFC 세계챔피언의 반열에 합류했다. 프랭클린은 성공적으로 2차 방어전까지 치렀다. 2005년 네이트 쿼리에게 KO승, 2006년 데이빗 르와조에게 판정승을 거뒀다. 네이트 쿼리에게 거둔 승리는 원펀치 KO승으로 하이라이트 영상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르와조에게 거둔 승리에서는 프랭클린의 투지를 엿볼 수 있었다. 프랭클린은 르와조와의 경기를 치르면서 수많은 부상을 입었고 5라운드 경기를 다 소화했다. 기회가 오면 경기를 끝내는 능력, 더 깊게 들어가서 판정까지도 경기를 치러낼 수 있는 능력은 프랭클린이 지닌 다양한 경기 스타일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프랭클린도 기회가 온다면 경기가 타격전으로 치러진다면 경기를 끝내는 능력도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거둔 5번의 승리중 3번은 KO승이었다.

2006년 10월 프랭클린은 앤더슨 실바에게 패해 타이틀을 잃었다. 프랭클린을 꺾은 앤더슨 실바는 거의 7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체급을 지배했다. 두 번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후 앤더슨 실바에게 도전장을 내민 프랭클린은 또 다시 패하고 말았다. 이 후 프랭클린의 전략은 헨더슨, 반더레이 실바, 벨포트, 리델, 그리핀과 같은 스타급 선수들과 경기를 치르는 것이었다.
 2012년 11월 마카오 대회에서 프랭클린은 쿵 리에게 패하고 말핬다. 계약상 마지막 경기에 대한 힌트를 주긴 했지만, 이번 월요일, 41살 생일로부터 일주일이 남은 시점에 프랭클린은 쿵 리와의 경기를 UFC 마지막 경기로 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마지막 경기 이후 가장 중요했던 것은 경기출전계약을 마무리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원 챔피언십(One Championship)과 아시아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바빠졌다. ‘유명인사'로서 처리해야할 일들도 있었다. 굉장히 바빴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기사에도 적었듯이 나는 느려진게 맞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수준높은 선수들끼리의 경기에서는 승리와 패배가 큰 차이로 갈리지 않는다. 내 경력상 나도 부상을 많이 입었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은 상태다. 몸관리에 신경을 썼다. 지금 내 경력을 한 번 되돌아 보고, 다시 한번 경기를 뛰어서 계약을 완수하자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아마도 금전적인 부분이 가장 큰 동기로 작용할 것이다. 나는 항상 내 자신에게 절대로 금전적인 목표로 경기를 하지는 말자고 이야기 해왔다. 그래서 다른 확실한 이유, 동기가 있어야 한다고 내 자신에게 말해왔다. 그래서 ‘타이틀전까지 갈 수는 없겠군’하는 시점에 왔다면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거다. 그래서 스스로 MMA계에서 퇴출되기 전에 스스로 정리를 한 것이다”
 하지만 프랭클린이 황혼기까지 해변가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리라고는 생각지 말라. 프랭클린은 여전히 매일 체육관에 가고, 원FC 부사장 임무를 수행하면서, 몇 가지 다른 사업까지 동시에 처리하고 있다. 그렇다. 프랭클린은 여전히 달리고 있다.
 하지만 ‘가장 챔피언 같지 않은 UFC 챔피언'의 타이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구가 리치 프랭클린을 수식하는데 적절한가?
 “이의는 없습니다”라고 프랭클린은 말한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이나 같이 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 절반에게 물어봐도 ‘완벽한 타이틀'이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미식축구 팀에선 선발로 나가지도 못했어요. 계속 운동선수로 살아온 건 맞지만, 어렸을 땐 크고 힘이 센건 맞아요. 하지만 키가 약간 더 큰 것 뿐이었죠. 옆으로 커지지는 않았으니까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땐 깡말랐었어요. 대학교에 들어가서 더 성장하기 시작했으니까요. 하지만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 3진, 아니면 어떤 스포츠라도 팀의 3진에 있었던 선수가 갑자기 세계 챔피언이 되는 건 가능성이 매우 낮죠. 그런 타이틀 써도 됩니다”
 모두들 경기 전에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옥타곤에 들어서면 자신의 경기력으로 군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이 경기가 있는 날 프랭클린을 그리워 하더라도, 스스로 결정을 내려서 옥타곤을 떠나는 장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프랭클린 자신은 현역선수로 뛰던 시절에서 어떤 부분을 그리워 하게 될까?
 “(선수로서의) 영광은 아닙니다. 내가 선수로 뛴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어요. 내가 경기를 준비할 때면 체육관 사람 전부가 저를 도와줬다는 그 사실입니다. 체육관 뿐만 아니라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지역사회에서도 저를 도와줬습니다. 마치 군부대가 장군 한 명을 뒤따르며 전투를 하러 가는 그런 느낌이죠. ‘내 삶은 내가 중심이야’하는 식의 자기만을 생각한 이기적인 건 목표는 아니었어요. 동지애를 느꼈던 거죠. 그 부분이 제가 MMA에서 가장 그리울 겁니다”
 
프랭클린은 29승 7패 1무효경기의 프로전적을 기록한 후 은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