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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명예의 전당 개요 - 제프 블래트닉

 


1994년 UFC 해설자였던 제프 블래트닉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격투기에 마지못해 출연하는 시늉을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프 블래트닉은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블래트닉은 어떤 일이라도 온 힘을 다해서 수행하는 인물이었다.1980년대 암을 이겨냈을 때도, 1984년 그레코로만 레슬링에서 금메달을 땃을 때도, 혹은 아버지나 남편의 역할을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무규칙격투기'라 불렸던 스포츠의 TV중계에 출연했을 때에도 앞 뒤 재지않고 최선을 다했으며 존 매카시 주심에게도 경기 및 선수들에 대한 까다로운 질문을 퍼부었다. 털사에서 열린 UFC 4 대회의 토너먼트 결승 진출자가 호이스 그레이시와 댄 새번이 될 것이란 것에 대해서도 블래트닉과 맥카시는 동의했었다.
 “제프 블래트닉은 UFC 4 대회부터 해설을 시작했는데 어떤 종류의 경기인지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죠”라며 맥카시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날 아침에 식사를 같이 했는데 선수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저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더군요. 그리고 호이스 그레이시와 댄 새번데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그래플링에 대한 믿음이 있더군요. UFC 2 대회에서 호이스 그레이시가 싸우는 걸 봤다고 해요. 제프 블래트닉은 ‘내가 보는 한에서는 결승에는 두 명의 그래플러가 올라갈 것 같아요. 댄 세번과 호이스 그레시이가 올라갈 거요’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제 생각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렇게 되겠죠’라고 대답했었지요”
 블래트닉은 동료 레슬러인 댄 세번이 이길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맥카시는 동의하지 않았다.
 “댄 세번을 존경합니다. 레슬링을 하는 걸 봤거든요. 어떻게 싸우는지도 봐왔고요. 하지만 댄 새번은 이게 어떤 경기인지에 대한 개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고 경기를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라고 맥카시는 말했다.
 “체구가 작은 그래플러가 큰 덩치의 그래플러를 이긴다는 것, 저는 이해를 못하겠어요”라고 블래트닉은 답했다.
 맥카시는 “왜냐면 이건 단순한 그래플링이 아니니까요. 이건 격투기거든요. 그리고 호이스는 경기를 끝내는 법을 알아요”라고 말했다.
 “이해가 안되요”라고 블래트닉은 말했다.
 호이스 그레이시와 댄 새번은 토너먼트 결승에서 만났다. 호이스는 경기 시작 후 6분이 경과한 시점에서 댄에게 서브미션 승리를 거뒀다. 블래트닉은 경기 후 맥카트니를 한 쪽으로 불렀다.
 “알겠소. 이제 이걸 좀 가르쳐줘야겠소”라고 블래트닉은 말했다.
 “그게 우리의 우정이 시작된 시점이었습니다. 만나서 어울릴 때면 항상 주짓수 스파링을 하곤 했어요”라고 맥카트니는 웃음을 지으며 2015년 7월 11일 UF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자신의 친구를 회상한다.
 안타깝게도 블래트닉의 현장참석은 불가능하다. 블래트닉은 2012년 10월 55세의 나이로 심장 수술 후 합병증으로 타계했다. 하지만 아내인 로리 블래트닉이 참석할 예정이다. 로리 블래트닉 여사는 남편인 제프 블래트닉이 MMA계에 대한 공헌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로리 블래트닉 여사는 “제프도 좋아했을 겁니다. 그리고 겸손해했겠죠. 제프가 MMA에 큰 기여를 했을 거라곤 생각치 않아요. 실제로도 그런 적은 없고요. 우리 사이에서 낳은 애들만 빼곤요. 하지만 마음 속 깊이 제프도 자신의 업적이 인정받는 사실이 행복할 겁니다. 조용하게 있으면서 자신을 내세우진 않았지만 MMA 업계에서 계속 머물렀던 사람이잖아요”라고 말했다.
존 맥카시는 “제프는 방송에 출연한 그 처음의 대회 이후 MMA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리고 MMA가 살아남도록 도움을 줬습니다”라고 말했다. 블래트닉은 종합격투기라는 이름을 짓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제프는 종합격투기라는 이름이 정착되도록 만든 사람입니다. 그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땐 모두들 무규칙격투기라는 용어를 썼어요. 저와 제프가 그걸 논의한 후 제프는 ‘계속 그 용어를 사용하겠어’라고 말하더군요. 처음 종합격투기라는 용어를 썼을 때 사람들은 불편하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은 무규칙격투기라는 말을 더 좋아했어요. 그래도 제프는 계속해서 종합격투기라고 말을 했죠. 그래서 종합격투기라는 용어가 정착된 겁니다”라고 맥카시는 말했다.
현재는 보잘 것 없이 들리지만, 당시는 종합격투기를 생존시키는 것 자체가 큰 일이었던 시절이었다. 케이블TV 방영 계약이 끊기고 모든 미디어에서 비난을 당하던 시기가 있었다. 제프 블래트닉은 존 맥카시 및 현 UFC 매치메이커 조 실바와 함께 MMA 통합룰의 초안을 뽑아낸 사람이기도 하다. MMA 통합룰은 현 시대 UFC 경기에 적용되고 있다.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UFC(당시는 SEG 소유)는 제프 블래트닉에게 의존해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제프가 UFC에 뛰어들었을 때, UFC는 최고 상승세를 타고 잘 나가고 있었죠. 모든 사람이 UFC에 매료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폭풍이 나가오고 있었죠. 그리고 폭풍이 휘몰아쳤을 때,  UFC는 제프가 지닌 명성을 이용했어요. 체육인, 올림픽 출전선수, 금메달리스트, 인도주의자 그리고 암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같은 제프의 명성을 이용했죠. 종합격투기 종사자 중 그런 명성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제프는 그런 명성을 종합격투기를 살리기 위해 댓가없이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종합격투기가 살아남는데 도움을 줬어요. 저와 함께 룰을 제정하고 종합격투기에 득이 될 아이디어들을 계속 해서 생각해냈죠”라고 맥카시는 말한다.
 “제프에게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저는 제가 룰을 써보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많은 이에게 피해를 입힐 걸 알고 있었죠. 그 당시에 유명선수였던 마크 콜먼도 피해를 봤을 겁니다. 박치기를 없앴거든요. 하지만 제프는 ‘존, 이건 마크 콜먼 개인보다도 더 큰 차원의 일이야. 종합격투기가 살아남기 위해선 마땅히 해야할 일이야. 이렇게 해야 대중들은 선수들이 무슨 경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해주더군요. 그런 방식으로 제가 MMA통합룰을 만들 때 도움을 줬고 제 표현으로는 중세시대, 다른 사람들 표현으로는 암흑기를 MMA가 극복하는데 아주 큰 기여를 한 겁니다."
하지만 제프 블래트닉은 자신이 이룬 업적에 대해서 절대로 이야기 하지 않았다. 가정에서 조차도.
“제프가 종합격투기와 관련해서 일했던 부분들은 그 이가 가버리고 나서 더 알게되네요. 살아있을 때보다도 더 많이요. 각종 상장이며 기사며...”라고 로리 블래트닉 여사는 말했다. “닉 렘보가 저에겐 물건들을 한 아름 보내면서 ‘제프가 관여하고 있었던 업무들입니다’라고 말해주거든요. 저는 ‘와, 어떤 건 전혀 뭔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했어요. 저도 놀랐던 거죠. 하지만 저는 제프가 계속 어떤 업무를 계속 하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제프 블래트닉은 UFC 32 대회까지 해설자로 일했으며, 이후에는 심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몇 번의 UFC 대회 개최에 참여하기도 했다. 7월 11일 제프의 가족, 친구, 그리고 MMA 커뮤니티는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제프를 기리는 행사를 치른다.
맥카시는 “종합격투기에서 제프 블래트닉의 공으로 인정되어야 할 부분은 엄청납니다. 종합격투기 및 종합격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일을 해줬습니다. 우리가 이제 공식적으로 인정을 해줘야 합니다. 제프는 자신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땃을 때처럼 UF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것도 기뻐할 겁니다. 그 정도로 종합격투기가 제프에게 지니는 의미가 큽니다. 저에게 아쉬운 것은 제프가 살아서 이걸 보지 못한다는 것이죠”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