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FC 데뷔를 앞두고 있는 선수가 부담과 중압감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 최대의 종합격투기 무대에 처음 들어서고, 첫 경기가 매우 중요하다보니 심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사람에 따라선 부담을 넘어 두려움도 생긴다.
한국인 최초의 UFC 라이트헤비급 파이터 정다운은 유난히 어려움이 많았다. UFC라는 무대에 처음 출전하는 사실만으로 긴장되는데, 경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상대가 두 번이나 바뀌는 불상사가 있었다.
보통 상대가 바뀌면 모티베이션이 크게 저하되기 마련이다. 한 명의 상대만 바라보며 집중해온 것이 무너지는 느낌도 받는다. 하물며 다른 경기도 아닌 데뷔전을 얼마 남기지 않은 가운데 상대가 두 번이나 바뀌었을 때의 심리적 데미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바뀐 선수가 만만치 않다. 정다운과 맞붙은 카디스 이브라기모프는 무서움을 전혀 모르는 패기 넘치는 24세의 신예였다. M-1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으로 8전 전승을 기록하다가 UFC에 입성했다. 오히려 더 강한 상대로 바뀌었다고 보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정다운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승리했다. 그는 이런 두려움과 중압감은 처음이었지만 냉정하게 이겨내면서 대처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했다. UFC 데뷔전을 통해 더 성장한 정다운과 다양한 대화를 나눴다(이하 일문일답).
- 승리 후 며칠이 지났다. 좋은 시간 보내고 있는가.
승리는 역시 좋다. 사람들을 만나기보단 거의 집에 있었다. 주변에서 너무 많은 관심을 주셔서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정리가 잘 되지 않고 있다.
- 경기 소감이랄까. 전체적인 총평 부탁한다.
이겨서 너무 좋고, 앞으로도 계속 이기고 싶은 생각이 든다. 큰 단체의 데뷔전에서 승리한 만큼 지금까지 거둔 어떤 승리보다 확실히 기쁨이 크다. 하지만 부족한 게 많았던 경기였다. 더 잘 할 수 있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 이번 승리가 어떤 점에서 의미가 있는가.
데뷔전 승리를 떠나 나로서는 이런 중압감을 처음 느꼈고 처음 경험하는 두려움의 극복이었다. 상대 선수, 다른 환경, 주변 분위기, 스스로에 대한 믿음 등 그런 부분에서 불안함이 있었지만 냉정함을 가지고 이겨냈다. 어려운 상황에서 냉정하게 바라보고 대처하는 것을 배웠다.
- 경기 전 인터뷰에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바뀐 상대에 대한 부담이 컸을 것 같다.
UFC에 데뷔하는 선수 치고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상대가 원래 출전이 예정된 선수고 내가 대체투입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시련에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것을 주변 분들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경기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무거웠다.
- 경기를 어떻게 풀어갈 계획이었나?
전체적인 흐름은 비슷했다. 무조건 큰 펀치가 들어온다는 생각을 했고, 그 타이밍에 카운터를 맞출 계획이었다. 그런데 타이밍을 잘 잡지 못했고 상대가 지쳤을 땐 하단을 공략하면서 과감히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 역시 데미지가 있었고, 이브라기모프가 체력이 빠진 중에도 한 번씩 강하게 휘두르다보니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상대가 과감히 들어올 땐 태클도 준비했는데, 여러 가지로 잘 되지 않았다.
- 1라운드에 위기가 있었다. 어떤 상태였고, 어떻게 이겨냈나?
공이 울렸을 땐 꿈꾸는 듯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긴장도 많이 했다. 꼭 처음 링에 오를 때 같았다. 그러다가 크게 한 방 걸리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만난 상대 중 펀치가 가장 강했다. 그땐 가드에 집중하며 무조건 버티자는 생각 밖에 없었다. 이브라기모프는 경기 전 다른 어떤 선수보다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긴장한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과감히 들어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 언제 이길 수 있다고 직감했는지.
한 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 이젠 내 차례라고 다짐했다. 상대의 리듬이 느려지고 속임 동작에 헛손질 반응을 하는 것을 보고 확실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겁이 많아서인지 과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 중량급인데 큰 펀치보다는 잽 위주의 공격이 많았다.
맞다. 공격 스타일도 사람 생각대로 따라가는 것 같다. 내 펀치는 볼륨이 많은 편이다. 정확한 각을 잡아 볼륨을 부풀리고 힘을 뺀 채로 치려 한다. 정확한 타격을 하려다 보니 그런 것 같다.
- 타격가인 만큼 서브미션을 구사하는 것은 의외였다. 닌자 초크는 준비한 기술이었나?
전혀 준비되지 않았지만 평소 훈련할 때의 습관이 좋은 기회를 만들었다. 스파링을 할 때 포지션의 흐름에 따라 한 번씩 걸리는 자세가 있다. 스프롤을 했는데 아나콘다초크나 다스초크 그립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초크로 연결시키기도 하고 그립을 잡은 채 상대를 흔드는 것도 좋아한다. 이번도 그런 상황이다.
- 경기 후 눈물을 보인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모든 것을 극복한 것에 따른 기쁨, 그리고 나에게 뭐라고 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너무했던 것 아니냐' 하는 투정 같은 눈물이었다.
- 12월 부산에서 대회가 열린다.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당연히 뛰고 싶다. 다시 큰 고비가 오겠지만 이번 경험을 발판삼아 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남은 기간 이번에 드러난 단점을 보완하고 싶다.
- 혹시 원하는 상대가 있는가.
중국 대회를 앞두고 취소된 두 명의 선수도 있지만,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지안 빌란테와 붙고 싶다. 스타일이 나와 비슷한데 펀치가 타이트하고 더 완성돼있다. 기본기가 충실한 선수이고 예전부터 그의 경기를 보면서 공부를 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스타일에 가깝다. 부산에서 싸우게 된다면 좋은 경기 펼치겠다.